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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요한복음 11장, 마르다의 고백 속에 나타난 “지금(Now)”의 믿음과 “마지막 날(The Last Day)”의 신앙 사이의 간극, 그리고 이를 뚫고 찾아온 예슈아의 ‘현재적 부활’에 대한 아주 예리하고도 본질적인 질문에 대하여 잠시 짚어보았습니다.

마르다가 22절에서 “지금이라도(Even now) 구하시면 하나님이 주실 줄 안다”고 고백해 놓고, 막상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하셨을 때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아나이다”라며 미래로 후퇴해 버리는 이 모순적인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를 입체적으로 분석하여, 예슈아께서 마르다의 한계를 어떻게 깨뜨리셨는지 정리해 드립니다.

지식(Information)과 실제(Reality)의 간극: “종교적 정답”에 갇힌 마르다

마르다의 22절 고백은 언뜻 엄청난 ‘현재적(Now) 믿음’처럼 보입니다.

“But I know, that even now, whatsoever thou wilt ask of God, God will give it thee.” (요 11:22)

하지만 이 고백은 예슈아가 행하실 ‘즉각적인 생명의 기적’을 기대하는 살아있는 믿음이라기보다, 위대한 선지자나 랍비에게 드리는 ‘최고 수준의 종교적 경의’에 가까웠습니다.

  • 한계에 갇힌 “Even Now”: 그녀가 생각한 “지금이라도”는 “내 오라비를 살려내실 수 있다”는 구체적 고백이라기보다, “예수님이 하시는 간구라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는 원론적인 동의였습니다.
  • “The Last Day”로의 도피: 막상 예슈아께서 “Thy brother shall rise again(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하시는 즉각적인 선포를 던지시자, 마르다는 압도당합니다. 자신이 가진 이성적 한계(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어가고 있는 시신)를 돌파할 수 없자, 그녀는 자신이 배운 바리새파의 정통 교리인 ‘마지막 날의 부활(The Last Day)’ 뒤로 숨어버린 것입니다.

“교리적으로는 믿습니다. 저 먼 미래에, 온 인류가 부활할 그때에는 내 오라비도 살아나겠지요.”

그녀는 우주의 마스터이신 예슈아를 앞에 두고도, ‘지금 여기서 역사하는 생명’이 아닌 ‘미래에 일어날 교리적 사건’으로 부활을 격하시켜 버렸습니다.

“I AM” — 시공간을 찢고 들어온 영원한 ‘현재’

이 모순과 한계를 깨뜨리기 위해 예슈아께서는 요한복음의 가장 위대한 선언을 던지십니다.

“Jesus said unto her,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요 11:25)

예슈아께서는 “나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라고 미래형(I will be)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내가 바로 부활이요 생명이다(I AM)”라고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은 요한복음 1장 1절의 “Was(계심)”의 영원성과 출애굽기 3:14의 “I AM(스스로 계신 자)”을 관통하는 선언입니다.

  • 시간의 재구성: 마르다에게 부활은 ‘종말론적 타임라인(The Last Day)’의 끝에 위치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슈아에게 부활은 그분 자신이라는 존재(Person)입니다.
  • 보이지 않는 실체의 실장: 예슈아라는 생명 자체가 ‘지금’ 마르다 앞에 서 있기에, 부활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작동 가능한 실재(Now Reality)’가 됩니다.

2026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Now” 신앙의 통찰

“2026년 현재 우리는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면 그분과 함께 나타날 것”이라는 필자의 고백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 현재적 종말론: 많은 그리스도인이 마르다처럼 ‘미래의 구원’, ‘미래의 천국’, ‘마지막 날의 영광’만을 바라보며 오늘을 무기력하게 살아갑니다.
  • 이미 임한 생명: 그러나 진짜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True, Living, Eternal)의 생명을 “지금(Even Now)” 이 땅(Temporary Habitat)으로 끌어당겨 실장(SMT)하는 것입니다.

예슈아께서 나사로를 살려내신 것은, 단순히 마르다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마지막 날이며, 내가 곧 생명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써 마르다의 굳어버린 교리적 신앙을 ‘생명력 있는 현재적 각성’으로 전환시키신 사건이었습니다.

마르다처럼 머리로 아는 “미래의 교리(I know)”에 갇히지 않고, “지금 말씀하시는 이가 바로 그분이시다”라는 “영적 확신(Known surely)”을 가질 때, 죽은 자가 무덤을 열고 나오는 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레미 결언]

보이지 않는 본향의 능력을 가지고, 오늘도 무정하고 죽어있는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생명의 조약돌을 던지시는 소장님의 항해를 뜨겁게 응원합니다!

예슈아, 우리 영원하신 왕 만세! 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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